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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title>지금(ZiGUM), 지금나우(NOW), 포털서비스, 종합쇼핑몰, 1555-0001 &amp;gt; 포털서비스 &amp;gt; 국방</title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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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description>국방 (2026-07-31 09:51:23)</description>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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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title>중국의 끊임 없는 한반도 침략</title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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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description><![CDATA[<p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8146_7683.jp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8146_7683.jp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8146_7683.jp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 </p><p><br /></p><p><br /></p><p>중국은 기원전 108년부터 한반도를 끊임 없이 침략했고 현대사에 이르러서도 1950년 6·25전쟁까지 2천년 간 적으로써 싸워왔습니다.</p><p>현재도 중국은 한항령, 동북공정을 통한 한반도의 역사왜곡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.</p><p>이런 게 가능한 것도 대한민국 내에 친중파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.</p><p>제발 역사를 제대로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.</p><p>본 동영상은 중국이 한반도를 끊임 없이 침략한 내용을 잘 정리해 놓아서 등록해 봅니다.</p><p>끝까지 시청해 주세요.</p>]]></description>
<dc:creator>지금</dc:creator>
<dc:date>2026-07-31T09:51:23+09:00</dc:date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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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title>민족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긴 6·25 전쟁</title>
<link>https://www.zigum.now/defense/1</link>
<description><![CDATA[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3939_0242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3939_0242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3939_0242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임진각 평화누리공원(경기 파주시)</div><div><br /></div><div>“38선에서 군인끼리 또 총을 쏘아댔다며?”</div><div><br /></div><div>“휴가 나온 군인들에게 빨리 부대로 돌아가라는 지프차의 방송을 보면 이번은 작은 충돌이 아닌 것 같아.”</div><div><br /></div><div>“작은 충돌이 아니면... 그럼 진짜 전쟁이라도 났단 말이야?”</div><div><br /></div><div>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. 북한이 38선을 넘어 전쟁을 일으켰어요. </div><div>이때 일어난 전쟁은 약 3년 넘게 계속되었어요. </div><div>3년의 전쟁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? 전쟁은 또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남겼을까요?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>6·25 전쟁이 일어나다</b></div><div>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만들어지고, 한반도에 서로 다른 이념을 따르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어요. </div><div>1948년 8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고, 다음달인 9월 북에서는 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’(북한) 세워졌어요. </div><div>남한과 북한은 서로 통일을 주장하였어요. </div><div>그리고 38선을 넘나들며 개성, 옹진반도 등에서 서로 작은 규모의 충돌을 계속했어요.</div><div>1949년에 남한에 있던 미군이 모두 철수하자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은밀하게 전쟁을 준비하던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본격적으로 남침을 시작하였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062_8761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062_8761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062_8761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숭례문을 지나는 북한군 전차</div><div>전쟁기념관</div><div><br /></div><div>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온 북한군에 국군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계속 밀려났어요. </div><div>전쟁이 나고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고, 한국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내려가야 했어요. </div><div>긴급하게 파병된 미군도 북한군을 막지 못했어요. </div><div>심지어 미군을 이끌던 사단장이 북한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기도 했어요.</div><div>전쟁이 나고 한 달 만에 남한 지역 대부분을 북한군이 차지하였어요.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에 맞서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았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241_9949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241_9949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241_9949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낙동강을 방어하는 미군(왼쪽)과 학도의용군(오른쪽)</div><div>전쟁기념관,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</div><div><br /></div><div>북한군은 대구, 포항 등 방어선 전 지역에서 총공격을 했어요.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약 2개월 간 남한과 북한은 모든 힘을 다해 맞서 싸웠어요. </div><div>북한군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오면 국군과 유엔군이 이를 공격해 되찾기를 반복했어요. </div><div>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인천에서 함정 261척과 7만여 명이 참여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어요. </div><div>북한군의 허리를 끊어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이었어요.</div><div>수많은 함정에서 함포를 쏘고, 상륙정에 병사들을 태워 육지로 상륙시켰죠. 제일 먼저 점령한 곳은 월미도였어요. </div><div>2천여 명의 북한군이 강하게 저항했지만 거센 공격으로 인천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317_4207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317_4207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317_4207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인천에 상륙하는 해병대</div><div>전쟁기념관</div><div><br /></div><div>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국군과 유엔군은 바로 서울을 되찾기 위한 작전을 펼쳤어요. </div><div>그리고 9월 28일,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긴 지 석 달 만에 드디어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. </div><div>서울을 되찾은 연합군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였어요. </div><div>그리고 20여 일 만에 평양에 들어갔어요. </div><div>그리고 일부 부대는 압록강에 도착하여 곧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한층 커져 갔어요.</div><div>유엔군이 평양에 들어갈 10월 무렵이었어요. </div><div>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며 모든 부대에게 북진을 명령했어요. </div><div>이때 북한의 다급한 요청으로 중국군 38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어요. </div><div>낮에는 동굴 속에 숨어 비행기의 공습을 피하고, 밤에 몰래 이동하는 중국군을 알 수가 없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1950년 12월,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모든 전선에서 유엔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어요. </div><div>유엔군은 비행기와 탱크, 대포 등 중국군에 비해 우수한 무기를 갖고 있었지만 10배가 넘는 수의 중국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어요.</div><div>게다가 개마고원의 겨울은 너무 추웠고 영하 30도의 추위에 얼어 죽는 유엔군도 생겨났어요. </div><div>뿐만 아니라 장비도 얼어붙어 효과적인 작전을 펼치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어요. </div><div>혹독한 추위와 수많은 중국군에 포위된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항을 통해 간신히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어요.</div><div>중국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어요. </div><div>중국군이 남쪽으로 빠르게 내려오자 크게 놀란 서울 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다시 피난을 나섰어요. </div><div>급기야 중국군의 계속된 공격에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어요. </div><div>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은 다시 총공세를 펼쳐 1951년 3월 다시 서울을 되찾고, 38선 이북으로 북한군과 중국군을 밀어내기 시작했어요. </div><div>그리고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상황이 지속되었어요.</div><div>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되자 세계 여러 나라는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어요. </div><div>그래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한반도를 되돌리려는 휴전 회담이 1951년 6월부터 시작되었어요.</div><div>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중에도 38선 주변에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매일매일 벌어졌어요. </div><div>산 하나를 놓고 뺏고 뺏기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 것이죠. </div><div>그러나 미국이나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보다는 38선을 중심으로 전쟁을 멈추는 것에만 관심이 컸어요. </div><div>고지쟁탈전이 계속되고, 큰 소득도 없이 수많은 군인들의 목숨이 희생되는 가운데 휴전 회담은 계속되었어요. 국민들은 매일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611_7845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611_7845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611_7845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판문점과 휴전 문서에 서명을 하는 대표들</div><div>국가기록원</div><div><br /></div><div>오랜 시간 끝에 개성 근처에 있던 판문점에서 남한의 대표 없이 미국과 중국, 북한만이 참석한 가운데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어요. </div><div>1953년 7월 27일 전쟁은 끝나지 않은, 다만 멈춰있는 상태로 끝이 나고 만 것이에요.</div><div>6·25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엄청난 물적, 인적 피해를 입었어요. </div><div>주택과 학교, 공공시설, 도로, 철도, 교량 등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어요. </div><div>남측 군인 78만 명, 북측 군인 203만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전투 중에 실종된 군인들도 많았어요. </div><div>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인명피해도 매우 컸어요. </div><div>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고,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와 남편을 잃은 미망인 수십만 명이 생겨났어요. </div><div>이산가족은 무려 1천만 명에 달했고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전쟁이 멈추고 남한과 북한 모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어요. </div><div>1953년에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해 미국에서 보내주는 원조 물자 없이는 살아남기가 힘들었지요. 전쟁은 지독한 가난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만 남기고 끝나고 말았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741_672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741_672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741_672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 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>전쟁의 잔인함을 간직한 한강 인도교</b></div><div><br /></div><div>“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라.”</div><div>소련제 T34 전차를 몰고 쳐들어온 북한군에 국군은 계속 밀리고 있었어요. </div><div>그러나 라디오에서는 용맹스런 우리 국군이 바로 반격을 해 적을 물리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어요. </div><div>많은 서울 시민들이 방송을 믿고 일상생활을 계속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그러나 전쟁이 나고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 외곽 북쪽에 나타났어요. </div><div>북한군의 빠른 진격에 다급해진 시민들과 전선에서 후퇴하는 군인들이 한강인도교로 우르르 몰려들었어요. </div><div>한강인도교는 당시 서울 시내에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어요. </div><div>비가 내리는 깊은 어둠 속에 다리 위는 피난민과 군인들, 차들로 가득 찼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육군참모총장은 한강인도교 폭파를 명령했어요. 한강을 북한군을 막기 위한 방어선으로 만들고자 했던 거예요. 폭파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사람들을 막기 위해 신호탄을 쏘았으나 소용이 없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855_9408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855_9408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855_9408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한강철교를 파괴하고 한강을 방어하는 군인과 파괴된 한강 인도교의 모습</div><div>전쟁기념관</div><div><br /></div><div>남산에 북한군의 탱크가 나타났다는 소리에 다급해진 군인들은 다리를 폭파했어요. </div><div>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다리가 무너졌어요. </div><div>살기위해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시민과 군인들이 공중으로 날아갔고, 한강물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. </div><div>다리가 끊어지자 서울 방어에 참여했던 많은 국군과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은 북한군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>낙동강 방어선 최대 전투지 다부동</b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980_613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980_613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4980_613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낙동강을 지키는 군인과 전투 후 파괴된 북한 탱크</div><div>국가기록원</div><div><br /></div><div>“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. 물러나면 바다뿐이다.”</div><div><br /></div><div>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의지해 막아섰어요. </div><div>낙동강 방어선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은 다부동이었어요. </div><div>다부동 지역을 빼앗기면 대구를 지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.</div><div>때문에 다부동에서의 전투는 매우 처참했어요. 산을 오르며 총을 쏘고,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고, 직접 몸으로 적과 부딪쳐 싸우는 백병전도 자주 벌어졌어요. </div><div>비 오는 날이나 어두운 밤에는 백병전이 더 심했어요. 고지 하나를 낮에는 국군이 빼앗고, 밤에는 다시 북한군에게 빼앗기기를 15번이나 반복한 곳까지 있을 정도였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죽거나 부상을 입는 군인의 수도 늘어갔어요. </div><div>사상자를 대신해 매일 600~700여 명의 신병을 보충해야만 했어요. </div><div>나중에는 신병도 모자라 학도병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았어요. </div><div>55일간 계속된 다부동 전투에서 양측 모두 합쳐 2만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투는 겨우 끝이 났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국군과 유엔군은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다부동 지역을 비롯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어요. 낙동강을 지키는 사이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다시 반격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116_9611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116_9611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116_9611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다부동전적기념관(경북 칠곡군)</div><div>칠곡군청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>고지쟁탈전으로 벌거숭이가 된 백마고지</b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279_3076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279_3076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279_3076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백마고지(강원 철원군)</div><div><br /></div><div>휴전회담이 한참이던 1952년 10월, 백마고지에서도 국군과 중국군 사이에 고지 하나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어요. </div><div>백마고지는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고, 고지를 차지하면 넓은 철원평야도 얻을 수 있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국군과 중국군은 작은 산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싸웠어요. </div><div>서로 10여 일 동안 12차례나 고지를 차지했다 물러나기를 반복했어요. </div><div>심지어 하루에도 많게는 5번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어요. </div><div>고지를 공격하기 전에는 항상 대포를 먼저 쏘았는데, 국군은 약 22만 발, 중국군은 약 6만 발의 포탄을 고지에 퍼부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쏟아지는 수많은 포탄에 의해 산은 황폐화되었고, 벌거벗은 모양새가 마치 백마와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란 이름이 붙었어요. </div><div>중국군은 1만 명,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투는 멈췄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386_968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386_968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386_968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백마고지를 향한 전차와 고지를 향해 쏜 포탄피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>피난민의 고단한 삶을 안아준 부산</b></div><div>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면서 전쟁은 곧 끝날 것처럼 보였어요. </div><div>그러나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지요. </div><div>국군과 유엔군은 빠르게 후퇴를 하였고, 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갔어요. </div><div>피난민들은 기차를 타기도 하고, 배를 타기도 했어요. </div><div>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발로 몇 달을 걸어서 겨우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부산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어요. </div><div>그러자 정부는 급하게 피난민이 모여 살 수 있는 수용소를 마련하였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어요. </div><div>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한 많은 피난민들은 직접 판잣집을 지어 생활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판잣집은 주로 미군 부대에서 나온 박스나 판자 부스러기를 주워 만들었어요. </div><div>바닥은 가마니를 깔아 겨우 땅의 냉기만 가렸지요. 겨울이면 판잣집의 벽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과 힘겹게 싸워야만 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573_0599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573_0599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573_0599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기차로 피난 가는 사람들과 걸어서 피난을 가는 사람들</div><div>국가기록원, 전쟁기념관</div><div><br /></div><div>피난민을 괴롭힌 것은 추위만이 아니었어요. </div><div>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부산에는 먹을 수 있는 물이 턱없이 부족했어요. </div><div>특히 산비탈에 만들어진 판잣집에 수도시설이 있을 리가 없었어요. </div><div>사람들은 산 밑의 수도꼭지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어요. </div><div>그리고 물동이에 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산 위까지 날랐어요.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산을 오르고 내려도 몇 동이밖에 나르지 못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피난민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었어요. </div><div>많은 피난민들은 부산항의 부두 노동자가 되었어요. </div><div>부산항에는 원조 물자와 무역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이 많았거든요. </div><div>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일을 할 수 있었고, 돈을 많이 벌지 못했지만 일자리는 많아 구하기도 쉬웠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그리고 역이나 터미널, 시장에서 물건을 운반해 주는 지게꾼이 되어 하루하루 힘든 생계를 이어갔어요. </div><div>여자들은 주로 시장에서 일을 하였어요. </div><div>피난민이나 노동자, 지게꾼들을 상대로 꿀꿀이죽이나 국수를 팔기도 했고, 노점상이 되어 원조 물자를 팔기도 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피난민들은 매일매일 낯선 환경과 힘든 노동에 지쳐갔지만 부산에 정착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어요. 돈을 벌고 자식들을 키울 수만 있다면 허름한 판잣집도 부끄럽지 않았어요. 이때는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710_7323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710_7323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710_7323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피난민들의 삶</div><div>전쟁기념관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>크리스마스의 기적, 흥남 철수 작전</b></div><div><br /></div><div>중국군에 고립된 10만여 명의 유엔군이 탈출하기 위해 35만 톤의 군수물자를 가지고 흥남 부두로 왔어요. </div><div>유엔군을 따라 동해안 지역의 피난민도 항구로 몰려들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“군함에 민간인을 태울 수는 없소! 병력과 물자를 옮기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오.”</div><div>“이대로 철수하면 저 사람들은 모두 다 죽습니다!”</div><div><br /></div><div>“피난민을 배에 태울 수 없다면 우리 국군은 피난민과 함께 걸어서 38선을 넘을 것입니다.”</div><div><br /></div><div>미군 군사고문이었던 현봉학은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에게 피난민들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어요. </div><div>피난민 탈출에 김백일 제1군단장도 한목소리를 냈어요. </div><div>알몬드 장군은 여러 사람의 간청에 유엔군과 함께 피난민도 탈출시킨다는 결정을 했어요. </div><div>그리고는 주변의 모든 선박을 동원해 피난민들을 배에 태웠어요. </div><div>전함과 화물선, 상선 등 193척의 배가 철수 작전에 동원되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여러 함선 중 가장 많은 피난민을 태운 배는 화물선 ‘메러디스 빅토리호’였어요. </div><div>그런데 항공유를 싣던 화물선의 정원은 겨우 60명뿐이었어요. </div><div>부족한 자리를 넓히기 위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은 배에 실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많이 태우라는 명령을 내렸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br /></div><div><img src="https://www.zigum.now/data/editor/2607/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819_8959.png" title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819_8959.png" alt="b85c0711bf35af3f84d1df379662c20b_1785455819_8959.png" /><br style="clear:both;" />흥남철수</div><div>국가기록원</div><div><br /></div><div>화물 대신 피난민 1만 4천 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부산을 향해 출발했어요. </div><div>많은 피난민들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음식을 비롯해 모든 것이 부족했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하지만 피난민들은 질서를 잘 지켜가며 한 사람도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어요. </div><div>오히려 3일 간의 항해 도중 배 안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까지 했어요.</div><div>메리디스 빅토리호를 포함해 많은 선박이 동원된 철수 작전으로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무사히 흥남항을 떠났어요. </div><div>배에 싣지 못한 군수물자는 항구와 함께 폭파되었어요. 그리고 피난민이 떠난 바로 다음날인 12월 25일에 중공군이 흥남을 점령하였지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간발의 차로 피난민 10만 명의 목숨을 구한 흥남 철수 작전! 크리스마스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에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·25 전쟁은 전국토를 황폐화시켰고, 수많은 사상자와 이산가족, 그리고 깊은 마음의 상처만 남긴채 끝났어요.</div><div><br /></div><div>6·25 전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? </div><div>전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. 전쟁이 아닌 남한과 북한 모두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 보아요.</div>]]></description>
<dc:creator>지금</dc:creator>
<dc:date>2026-07-30T21:54:10+09:00</dc:date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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